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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이야기

방사선 방호의 역사ㅣ맨해튼 프로젝트

by 시티헌터7 2024.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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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방사선 노출

인류는 태고부터 자연방사선(natural radiation)에 노출되어 왔지만, 방사선 피폭에 대해 주의하게 된 것은 1895년 말 뢴트겐(Wilhelm Röntgen)이 X선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X선 발견 이전에는 천연에 존재하는 자연방사선이 주된 방사선 원천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연 방사선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고, 방사선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X선 발견과 초기 방사선 손상

자연방사선 외에도 인공적인 방사선 발생으로 인한 피폭이 있었을 가능성도 후에 밝혀졌습니다. X선 발견 발표 이전에 고전압 진공관 장치를 이용한 실험 중 방사선 손상으로 판단되는 증상이 나타난 사례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

 

X선의 발견은 의료 분야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발견 직후부터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방사선의 위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사용자나 환자가 거의 무방비로 방사선에 노출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도 안구에 방사선 손상을 입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는 X선 실험 중 안구 손상을 경험했고, 이는 방사선의 위험성에 대한 초기 경고로 여겨졌습니다.

 

 

방사성 물질의 발견

1896년에는 앙리 베크렐(Henri Becquerel)이 우라늄 염(Uranium salt)을 이용한 실험 중 스스로 방사선을 방출하는 성질을 발견하였습니다.

 

1898년에는 피에르 큐리(Pierre Curie)와 마리 큐리(Marie Curie) 부부가 폴로늄(Polonium)과 라듐(Radium)을 발견하고, 이물질이 갖는 방사능 성질을 처음으로 규명하였습니다. 큐리 부부는 폴로늄과 라듐의 스스로 방사능을 내는 성질을 일컬어 방사능( radioactiv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방사능 연구에 몰입하던 베크렐이나 마리 큐리도 방사선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안타깝게도 마리 큐리는 장기간의 방사선 노출로 인해 결국 방사선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방사선 방호의 초기 인식

1898년에는 X선에 의한 방사선 손상이 어렴풋이 공인되었고, X선관에 외장을 입히고 콜리미터(collimator)를 사용할 필요가 있음을 롤린스(Rollins)가 제기했습니다. 그는 X선 방호를 위한 장치를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1901년 뢴트겐은 X선 발견 공로로 제1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방사능 단위로 큐리(Ci)가 채택된 것은 1911년입니다. 이는 방사성 물질의 방사능을 측정하는 중요한 단위로 사용됩니다.

 

X선을 빈번히 사용하던 의사나 간호사들에게서 방사선 손상이 보고되면서 방사선 방호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1915년에 뢴트겐학회가 'X선 방호 권고안'을 채택하였습니다. 이는 방사선 방호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방사선 방호 규칙의 제정

1922년 미국 뢴트겐학회는 방호 규칙을 제정했고, 같은 해 팔러(Pauler)는 개인의 방사선 피폭을 필름을 이용해 감시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1925년에 머셀러(Moseller)는 처음으로 '용인선량(tolerance dose)'을 제안했습니다.

 

같은 해 열린 제1차 국제방사선의학회(ISR) 총회는 방사선량 측정 단위를 개발하도록 국제방사선단위측정위원회(ICRU)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방사선 측정과 관리에 있어 중요한 진전을 의미합니다.

 

ICRU가 제안한 방사선량 단위인 뢴트겐(R)은 1928년 제2차 ISR 총회에서 채택되었습니다. 또한 ISR은 방호 지침을 마련할 기구로 국제X선라듐방호위원회(IXRPC)를 설치했습니다. 

 

 

방사선 방호의 발전

1929년 미국 X선라듐방호위원회(CXRP)가 설치되었고, 1931년 CXRP는 1일 0.2R의 피폭 한도를 제시했습니다. 1934년 국제X선라듐방호위원회(IXRPC)도 동일한 용인선량을 채택했습니다. 이러한 규제들은 방사선 노출로 인한 건강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중요한 조치들이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에는 가속기를 이용한 인공방사능 제조가 가능함이 밝혀졌고, 1939년에 핵분열이 발견되면서 새로운 방사선원을 사용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와 방사선 방호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는 방사성 물질의 취급을 수반하였고, 이에 따라 방사선 방호 기술도 발전했습니다. 최대허용신체부하량(MPBB) 개념과 다양한 방사선의 피폭을 동일한 척도로 표현하기 위한 rem(roentgen equivalent to man) 개념, 그리고 보건물리(health physics)라는 용어도 이 시기에 발전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방사선의 생물학적 영향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원자폭탄 투하와 방사선 방호의 전환점 1945년 일본에 투하된 핵무기는 방사선 방호의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했습니다. 원자폭탄 생존자와 같이 고선량의 방사선에 노출된 대규모 집단을 대상으로 인체에 대한 방사선의 영향을 조사하는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전쟁 직후, 미국 군대가 주도한 원자폭탄 피해 조사 위원회(Atomic Bomb Casualty Committee, ABCC)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피해 지역의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평가하는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방사선의 위험이 이전에 이해했던 것보다 높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허용 용량이 일일 0.2R(주당 1R)에서 주당 0.3rem으로 하향 조정되었습니다. 특히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으로 급성 손상뿐만 아니라 지연 손상도 인식되면서 방사선 방호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1950년, IXRPC의 기능을 재조직하여 국제 방사선 방호 위원회((ICRP)가 출범했고,1950년대 후반부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슬로건 아래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방사선 방호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하게 만들었습니다.

 

 

원자로 사고와 방사선 방호

1957년 영국 윈드스케일 원자로 사고, 1979년 미국 TMI-2호기 원전사고, 1986년 소련 체르노빌 원전 사고 등은 방사선 방호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이러한 사고들은 방사선 방호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7년에 개정된 ICRP 26은 방사선 방호의 최적화(ALARA) 개념을 정립하였고, 유효선량(effective dose) 개념을 도입하였습니다.

 

 

원자력 발전과 방사선 위험 인식

2011년 일본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방사선 방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켰으며, 방사선 위험에 대한 사회적 반응이 민감해졌습니다. 사고 후 오염수 누설 문제는 방사능 이슈를 재점화시켰고, 일본산과 국내산 생선 소비를 크게 위축시키는 현상을 초래했습니다.

 

 

결론

1945년 원폭 투하 이전까지는 방사선의 특별한 능력에 매료되었던 시대였다면, 이후는 원자력 에너지의 본격적 이용과 방사선 위험에 대한 우려가 표출되는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방사선 방호의 역사는 방사선의 유용성을 인식하면서도 그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과정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방사선 방호는 과학적 연구와 기술 발전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해 왔으며, 앞으로도 안전한 방사선 이용을 위한 중요한 분야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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